꼬리가 길면’ 소비자는 더 즐거워
미국의 오프라인 대형 서점인 보더스(Borders) 매장에는 약 10만종의 책이 있지만, 온라인 서점 아마존에는 370만 가지의 책이 있다.
아마존에 있는 책의 97%는 보더스에서 취급조차 하지 않는, 이른바 보잘 것 없는 ‘긴 꼬리’다. 하지만 오프라인 대형 서점에 진열도 안 되는 이런 비인기 책들은 아마존 매출의 무시 못할 비중(25%)을 차지하고 있다.
미국의 IT잡지 와이어드(Wired)의 편집장 크리스 앤더슨이 쓴 ‘롱테일 경제학’은 소비가 히트 상품 위주에서 수 많은 틈새시장이 있는 ‘롱테일(long tail)’ 부분으로 점점 번져가는 현상을 다루고 있다.
크리스 앤더슨은 상품 종류의 폭발적 증가가 온라인 음악, 비디오 등 미디어 콘텐트 산업 전반에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물리적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인터넷에 힘입어, 엄청난 다양성이 지배하는 롱테일 시장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롱테일 시장은 어디까지 왔는가. 2000년대 초만해도 온라인으로 많이 거래될 상품으로 금융, 서적, 컴퓨터, 가전제품 등이 꼽혔다. 하지만 현재 온라인 쇼핑에서 가장 중요한 카테고리는 옷(의류)이다다. 2006년에 온라인 쇼핑몰은 전년보다 26%라는 높은 성장을 했는데, 특히 의류는 50% 성장했다.
만져보고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중요한 옷의 특성은 분명 하드디스크 크기나 프로세서 속도 등 규격화가 잘 되어있는 PC를 사는 것에 비해 온라인 쇼핑에 불리한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다양성’이 결정적인 것으로 분석된다. 상품이 다양하면 내 취향에 맞는 것을 고를 수 있기 때문이다. 백화점, 대형 서점 등 큰 매장을 찾는 중요한 이유는 여러 가지 상품을 보고 고를 수 있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은 인터넷에서 수많은 옷을 구경하고 고르면서 그 끝없는 다양성에 즐거워한다. 롱테일 법칙이 잘 적용되는 것이다.
공급자 입장에서도 다양성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느 온라인 컴퓨터 쇼핑몰에나 삼성, LG, IBM의 똑 같은 모델들이 있다. 쇼핑몰은 무엇으로 경쟁하고 있는가? 가격이다. 소비자는 같은 모델을 더 싸게 파는 쇼핑몰을 찾아간다. 그러므로 수익성이 높은 사업이 되기가 어려운 것이다.
의류가 컴퓨터와 가장 다른 점은 소비자가 가격비교를 덜 한다는 것이다. 온라인 쇼핑몰에는 수 없이 많은 옷이 있다. 하지만 똑 같은 옷 자체가 드물고, 있어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가격 경쟁도 상대적으로 덜하다. 잘 되는 의류 쇼핑몰의 영업마진은 30% 정도 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개성적인 감각이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의류 쇼핑몰을 창업하는 사람이 크게 늘고 있는 것이다.
누가 이러한 흐름을 주도하는가. 최근 급속히 성장한 G마켓, 옥션 등 인터넷 장터(오픈마켓)의 경우 실제로 상거래를 이끌어 가는 것은 여기에 입점해 있는 소기업들이다.
의류의 경우, 오픈마켓에서 어느 정도 사업감각을 익힌 이들이 독립 웹사이트를 만들어서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 랭키닷컴의 올 2월 자료에 의하면 여성 보세의류 전문몰의 방문자 수는 1년 사이 48% 상승했다. 오픈마켓은 5% 성장, 종합쇼핑몰은 9% 하락했다. 화장품이나 컴퓨터·도서 등 대부분의 전문쇼핑몰이 평균 28% 하락한 것에 비하면 엄청난 기세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의류 쇼핑몰 시장은 새로운 다양성 창출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 대기업이 고객의 요구를 세분화해 다양한 상품을 만드는 다품종 소량생산과 달리, 개별적으로는 소수의 틈새 상품에 특화된 소기업이 많이 모여서 시장 전체적으로는 다양성을 제공하는 구조다.
그렇다면 컴퓨터는 본질적으로 다양성이 있기 어려운 것일까? 그렇지 않다. 다양성에 대한 욕구는 컴퓨터, 자동차, 건설 등 모든 산업에 잠재해 있다. 단지 기업 입장에서 어떻게 이루어내느냐의 문제이다.
소비자는 다양성을 스스로 만들어 내고 있다. 그 중에 하나가 튜닝(부분개조)이다. 똑 같은 자동차로 내 개성을 표현하기 위하여 소비자들은 튜닝 매장을 찾는다. 휴대폰도 튜닝한다. 급성장하는 실내 인테리어도 결국 주택의 튜닝이다.
소비자들은 일단 쉬운 겉에서부터 시작한다. 자동차 튜닝도 유리에 색 넣고, 타이어 바꾸는 수준에서 점점 성능에 영향을 미치는 안쪽으로 파고들고 있다. 인테리어도 벽지에서 거의 내부 공사를 다시 하는 수준까지 올라왔다. 과연 우리 산업에서 뭐가 소비자들이 원하는 다양성인가.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가장 겉에서부터 생각해 보라.
이러한 다양성을 맘껏 소비하게 만들려면 소비의 부담이 적은 사업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소비의 부담이란 한 상품을 소비하는데 필요한 시간, 돈, 노력 등이다. 뷔페 식당에서는 누구나 10가지 정도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왜? 조금씩 먹어도 되기 때문이다. 몇 분짜리 온라인 동영상은 하루에 수십 개도 볼 수 있지만, 1시간짜리 TV프로는 하루에 두세 가지 보기도 벅차다.
▲장효곤 이노무브 그룹 대표 컴퓨터는 어떤가. 아무리 다양한 상품이 있어도 100만원 정도의 가격으로는 많이 즐기기 부담스럽다. 이런 경우에는 혁신적 사업모델을 생각해야 한다. 튜닝을 포함해 멤버십이나 렌트(대여) 등 혁신적인 모델이 있을 것이다.
고객이 원하는 다양성을 기업이 모두 직접 공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림은 개인이나 중소 상인이 그리게 하고, 기업은 그들이 창의성을 마음껏 발휘하는 캔버스가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최근 각광받는 웹 2.0 기업인 유튜브나 판도라TV도 동영상 부문에서 개인들의 캔버스 역할을 한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가장 성장이 빠른 지마켓이나 옥션 같은 오픈마켓도 상거래 분야의 캔버스나 마찬가지다. 롱테일 시장은 개성의 표현을 소비자에게 가까운 곳으로 돌려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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